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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가이드 - 뉴스
1950年 보스턴마라톤 완벽제패의 주역 함기용
편집자   등록일 : 2013-10-11 오후 6:55:08


똑같이 우수한 기량을 갖추고도 크게 빛을 보지 못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드라마틱한 승리의 주인공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되는 선수도 있다. 마라토너 함기용은 후자에 속한다. 1950년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인이 1~3위를 휩쓴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일인데, 당시 우승을 거머쥔 주인공이 바로 함기용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달리기에 취미 없는 일반인들도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마라톤 스타로 남아있다.


음악가 지망생과 마라톤의 운명적 만남

마라토너 함기용은 강원도 춘성군(현 춘천) 신동면 사암리에서 부농의 5남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소학교가 6km나 떨어져 있어 등하굣길에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뛰어가곤 했지만 운동엔 관심이 없는 소년이었다. 대신 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장차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소학교 졸업 후 당시 수재들이 모인다는 춘천사범학교(6년제)에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진로는 졸업 후 교사의 길을 걷게 돼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사건을 통해 함기용 선수는 마라토너로 거듭나게 된다.

첫 번째는 손기정, 남승룡 두 영웅과의 만남이었다. 육상 꿈나무 발굴을 위해 학교에 찾아와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 상영회를 가졌는데, 함기용은 영화 속 손기정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두 번째는 교내 단축마라톤대회였다. 큰 기대 없이 참가했는데 덜컥 우승을 하고 말았다. 비록 육상부 선수들을 제외하고 치러진 것이었지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크게 고무된 사건이었다.

세 번째는 1947년 경춘역전경기 참가다. 교내대회에서 우승한 전력 때문에 보결선수로 동원되어 한 구간을 뛰었는데, 그것을 본 손기정 선생이 “가능성이 있으니 열심히 해 보라”며 격려해주었다.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함기용은 곧 육상선수가 되기로 마음을 굳혀버렸다. 손기정은 그가 육상명문 양정고보로 편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양정고보에서 6개월간 연습한 함기용은 1948년 봄에 런던올림픽 파견선수 선발전에 참가했고 서윤복, 최윤칠, 홍종오에 이어 4위를 차지하여 후보 자격을 얻었다. 런던 현지에서 열린 25km 평가전에서도 당당히 2위를 차지했지만 본 경기에는 국내 선발전 1~3위만 참가하여 저조한 성적을 냈다.


혼돈의 시절, 보스턴 정벌의 주역이 되다

이후 2년여 동안 열심히 훈련한 함기용은  1950년 2월에 열린 보스턴마라톤 파견선수 선발전에서 2위를 차지하고 최종 평가전에서도 2위를 차지해 최윤칠, 송길윤과 함께 보스턴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0세였다.

대회가 열린 4월 19일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등 기상조건이 좋지 않았다. 가냘픈 체격의 함기용은 20km 지점가지 50위로 처져서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몸이 풀리자 속력을 내기 시작해 무서운 기세로 앞선 선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질풍같이 달려 25km 지점까지 왔을 때 그는 당당히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불과 5km를 달리면서 무려 50여 명이나 따라잡은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38km 심장파열언덕에 올라섰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일까. 맹렬한 스피드로 달려온 그는 다리가 풀려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골인점을 불과 4km 정도 남겨두고 힘이 다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는 다리를 끌며 걷다가 힘이 나면 뛰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질주가 워낙 빨랐던 탓에 추격하는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스무살 청년 함기용은 2시간 32분 39초의 기록으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보스턴마라톤 우승자가 되었다. (당시 마지막 4km를 걷고도 우승했다 해서 ‘워킹 챔피언’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2위와 3위 또한 한국의 송길윤, 최윤칠이었다.

아시아 작은 나라의 선수 세 명이 보스턴마라톤 1~3위를 휩쓴 이 사건은 세계 육상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국민들이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서울 시내는 축하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세 선수는 전국을 순회하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환희도 잠시. 그들의 전국 순회가 끝나기도 전에 6ㆍ25 전쟁이 발발했다. 불세출의 영웅 함기용은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은퇴 아닌 은퇴를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고대 법대에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고 졸업 후 기업은행 행원으로 일하다가 기업은행 마라톤팀이 창단되자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기업은행 지점장으로 있다가 85년 퇴직하고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와 부회장을 맡아 육상계에 헌신했다. 현재는 아내 김명자 여사와 함께 단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민족의 비극에 휩쓸려갔던 우승의 영광

이제 막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마라톤 선수가 졸지에 전쟁을 겪게 됐을 때 그 심정은 실로 참담했을 것이다. 6ㆍ25는 그에게 남은 선수시절을 앗아갔고, 소중한 보스턴마라톤 우승 메달까지 빼앗아가버렸다.

당시 함기용은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우승 메달과 대회 당시 입었던 훈련복, 사진첩 등을 동대문야구장 우측 외야 구석에 파묻었다.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그곳이 더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귀경한 그가 묻은 곳에 가보니 누군가 파간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에게 메달이 되돌아온 것은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재미교포 출신 의학박사 김태형 씨가 보스턴마라톤대회 조직위에 딱한 사정을 알리고 새 메달을 부탁했던 것. 조직위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까지 나서서 공식 요청을 하자 같은 모양의 메달을 특수 제작하여 보내왔다.

마라톤 데뷔와 동시에 세계 제패를 이룬 함기용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당대 최고의선수였다. 그가 세계무대에서 더욱 활약할 기회를 잃은 것은 6ㆍ25가 남긴 많은 비극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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