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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가이드 - 뉴스
80~90년대 한국 마라톤의 풍운아 ‘김재룡’
편집자   등록일 : 2013-12-29 오후 11:59:25

 

황영조, 김완기와 함께 8, 90년대 한국 마라톤을 풍미한 마라토너 김재룡은 뛰어난 실력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선수다. 너무 유명한 마라톤 스타들과 동시대를 사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겐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물론 마라톤 마니아들이라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김재룡은 1966년 전남 고흥군 포두면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포두중학교) 시절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다. 또래들보다 지치지 않고 오래 달리는 재주가 있기는 했지만 운동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TV에서 손기정 선생 등 마라톤 스타들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맨발의 영광」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중학교 3학년 때 체육교사로 부임해 온 윤여춘 선생(현 MBC 육상해설위원)이 그의 달리기 소질을 발견하고 육상을 권유하면서 마라토너로서의 첫 발을 떼게 되었다. 정식 육상부가 없어서 클럽활동처럼 방과 후에 조금씩 연습하는 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김재룡은 조대부고(조선대학부속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첫 해 2학기부터 육상부에 발탁되어 제대로 된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전까지 취미 정도로 하던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하려니 힘에 부치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려서부터 단계를 밟아 온 동료들보다 몇 배로 훈련해야 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서 학교도 육상도 다 집어치우자 생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을 고쳐먹고 학교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이런 일이 줄잡아 10여 회나 된다고 한다).

 

2학년 말부터는 마라톤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훈련에 매진하여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 10km에 나가기도 했다(그때까지 팀 이탈을 자주 하여 대회 참가 기회가 거의 없었다). 주위에서는 20위 정도의 성적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초반에 선두를 달리자 코치는 페이스를 줄일 것을 지시했고, 김재룡은 힘을 다 쓰지 않은 채 5위를 했다.

 

이 시합이 너무 아쉬워 그는 휴가도 반납하고 훈련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통일역전경주대회> 6개구간을 뛰어 전구간 신기록을 내며 최우수선수상을 탔고 이후 참가한 고교 도로경기에서 전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의 전은회 선수(배문고)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고교 최강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었다.

 

부상 중에 일구어 낸 한국기록 2시간 13분 35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재룡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85년 한전에 입사했다. 당시 부속고등학교 운동부원들은 모(母)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조선대학교에는 장거리 육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전에 둥지를 튼 그는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더욱 훈련에 매진했고, 이듬해 상무에 입대하여 1987년 <동아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사실 훈련 중 부상을 입어 대회를 앞두고 조깅조차 못하는 처지였지만, 일정한 성적을 내야만 상무에 머무를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꼭 참가해야 했다. 불참할 경우 전방 부대로 보내져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끊기게 될 판이었다. 그는 불과 보름 동안 훈련을 하고 대회에 나가 뛰었다. 완주하지 않으면 꿈이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뛰었는데 뜻밖에도 2시간 13분 35초의 한국 신기록을 작성하게 되었다.


부상이 낫지 않은 채로 그해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고 이듬해 <동아마라톤>대회에도 출전해 2시간 16분대의 호기록을 냈다. 그러나 대회를 마친 후 부상이 누적된 상태에서 훈련을 강행한 그는 십자인대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제 기량을 낼 수 없고, 수술을 하면 낫기는 하지만 마라토너로서의 생명은 끝난다는 진단이 떨어졌다.


김재룡은 수술을 포기하고 1년여에 걸친 끈질긴 재활훈련 끝에 부상을 극복했다. 무릎이 온전해진 후에는 훈련 부족 때문에 처음부터 몸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결국 1989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출전해 4위(2:18:42)를 차지하며 보란 듯이 재기할 수 있었다.

 

끈질긴 집념으로 2시간 10분 벽을 넘어서다

 

재기전에 이어 참가한 1990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김재룡은 크게 고배를 마셨다. 상승세를 탄 컨디션을 믿고 장거리 훈련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30km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고도 마지막에 44위를 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김완기는 2시간 11분 34초로 한국신기록을 냈다. 그는 분한 나머지 아버지께서 “대회마다 따라다니니 부담스러워 못 뛰겠다”고 말해버리고는 크게 후외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부친은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고, 김재룡은 반성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심기일전 해 지구력 훈련에 매달렸다. 잦은 부상을 근력으로 이기기 위해 본 훈련 이외에 틈만 나면 걷기 훈련을 했다.


스스로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킨 그는 1991년 <동아마라톤>대회 우승에 이어 같은 해 겨울 <후쿠오카 마라톤>대회 6위를 차지했다. 특히 후쿠오카 대회는 몸살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2시간 11분 51초를 내 가능성을 보여준 경기였다.


김재룡은 1992년 <동아마라톤>을 앞두고 연습주에서 2시간 8분대 기록을 두 번이나 내며 10분 벽 돌파에 대한 자신을 얻었다. 그런데 대회를 한 달쯤 앞두고 느닷없이 황영조가 <벳부-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의 기록을 내자 그는 크게 낙담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라이벌 김완기와 접전 끝에 2시간 9분 30초의 좋은 기록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본인의 최고기록이자, 당시 국내대회 최고기록이었다.


이후에도 김재룡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마라톤 10위(2:15:01), 1993년 <보스톤마라톤> 2위(2:09:43), 1993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4위(2:17:14),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마라톤 3위(2:13:12), 1995년 <보스톤마라톤> 7위(2:12:15) 등 꾸준한 성적을 내며 한국 마라톤을 이끌었다. 국내 선수로는 드물게 서른을 넘겨서까지 현역으로 뛰다가 1996년 부상을 계기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한국전력 육상팀 코치로 백승도, 장기식 등의 선수를 키워냈고 지금도 여전히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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