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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가이드 - 뉴스
세계제패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인 ‘김은배’
편집자   등록일 : 2014-04-07 오후 9:30:32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 이전의 한국마라톤이 세계수준과 완전히 동떨어져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첫 마라톤 기록(1927 마봉옥 3:29:37)은 비록 당시 세계기록보다 1시간 이상이나 뒤처진 것이었지만 곧 비약적인 기록 단축이 이루어져 1930년(이성근 2:36:50)에는 7분 차이로 격차를 줄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김은배와 그의 선배 권태하 등이 한국마라톤의 황금기를 열며 당당히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907년 서울 광화문 근처의 쌀집 둘째아들로 태어난 김은배(~1980)는 당시로서는 꽤 넉넉한 환경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취미는 달리기를 유난히 잘 하는 두 살 터울의 형 진배와 함께 달리기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동보통학교를 거쳐 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알아주는 축구 명문학교여서 학교 운동장을 늘 축구부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축구부도 아닌 그는 달리기 연습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학교 측에서 달리기 소질을 알아보고 형 진배가 육상선수로 활약 중인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에서 함께 연습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다. 그해 김은배는 전조선육상대회 1500m 부문에서 성인 참가자들을 물리치고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본격적인 육상선수 생활은 2학년 때(1928) 양정고보로 전학가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실업팀 이상의 수준이었던 양정 육상부 내에서도 그의 실력은 유독 빛을 발했다. 1930년 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그는 1500m와 5000m, 8km 단축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경인역전경주와 조선신궁대회 등 굵직한 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한국 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마라톤 데뷔전서 비공인 세계기록… 한국 최초 올림픽 티켓까지

 

그에 대한 기대는 곧 현실로 입증되었다. 1931년 10월에 열린 제7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2시간 26분 12초의 놀라운 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최고기록 2시간 29분 01초(1925년 알버트 미첼슨)를 크게 앞선 기록이었다. 물론 당시 국내에서 열린 대회의 기록은 코스 길이 등을 검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선수도 세계의 마라토너들과 충분히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대회는 1932년 제10회 LA올림픽 대표선발전을 겸해서 열렸기 때문에 당연히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그는 함께 대표로 선발된 선배 권태하와 함께 일본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당시 한국 선수는 한국과 일본에서 2차례 선발전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김은배는 그간의 피로가 누적됐던 탓인지 급격한 컨디션 난조에 빠졌다. 30km까지는 잘 달렸지만 이후로 급격히 체력이 저하되어 페이스가 떨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양정고보의 은사(일본인) 미네기시는 함께 응원하러 왔던 남승룡 선수에게 동반주를 지시했다. 비록 공식 대회에서의 동반주는 반칙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어린 김은배 선수가 페이스를 잃고 헤매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승룡은 대회 운영위원에게 여러 번 쫓겨나면서도 5km 가량 함께 뛰며 페이스를 끌어주었다. 그 덕에 다시 제 페이스를 되찾은 김은배는 결국 마지막 5km에서 막판 추격전을 펼쳐 일본 선수들을 따돌리고 선배 권태하(1위)와 함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고야 말았다.

 

작전지시는 '일본선수에 뒤져라' 식민지 마라토너의 비극

 

한국인 두 명(권태하, 김은배)과 일본인 한 명(쓰다)이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선수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선수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선수 선발 과정은 물론 올림픽에 참가해서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세 명의 선수 중 3위로 대표팀에 합류한 일본인 쓰다가 선수 겸 코치를 맡아 혼자서만 코스 답사를 하는 등 상식을 벗어나는 횡포를 부렸다.

 

대회 당일 작전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권태하, 김은배 선수에게 자기 뒤만 따라오되 절대 앞으로 치고 나오지 말라고 주문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권태하는 쓰다의 말을 그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어린 김은배는 이 감히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고기록이 좋은 김은배보다 권태하가 더 입상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권태하는 현지에서 감기약 처방을 잘못 받는 바람에 컨디션이 엉망이 돼버렸고, 대회 직전에는 체중이 5kg이나 빠졌다.

 

드디어 올림픽 레이스가 시작되자 권태하는 예상대로 고전했고 김은배는 몸이 좋았다. 문제는 코치 겸 선수인 쓰다의 서슬에 좀처럼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끝내 어기지 못하고 5위(2:35:42)를 차지한 쓰다에 이어 6위(2시간 37분 28초)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식민지 국가의 어린 선수에겐 올림픽도 결코 축제의 무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권태하는 레이스 중반부터 다리 경련을 일으키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없는 체력을 쥐어짜며 마지막 7km를 남겨두었을 때는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자진의 순위나 기록도 모른 채 그저 뛰고 또 뛸 뿐이었다. 페이스가 느려지자 뒤따르던 선수들이 그를 앞질러갔다. 결국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경기장에 들어온 권태하는 경승선을 10m 앞두고 쓰러져버렸다. 트랙에 그어진 흰 선을 결승 테이프로 착각한 것이다. 다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기어서 10위로 골인하자 사람들은 마라톤이 아니라 ‘비극’ 이라고 탄식했다.

 

전혀 다른 내용의 레이스를 펼쳤지만 결국 두 선수들에겐 씻을 수 없는 아쉬움과 상처가 남는 올림픽이었다. 만약 쓰다가 말도 안 되는 강압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김은배는 당시 2시간 26분대에 육박하는 스피드로 우승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넘을 수 없는 현실에 환멸느껴 사업가 변신하기도

 

김은배는 LA올림픽 이후 선수생활 더 이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육상 원로들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횡포에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8·15광복 후 그는 대한체육동지회 간사·상무이사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육상경기연맹·한국마라톤보급회 등을 조직하여 서윤복,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스타 선수들을 양성했다. 제15회 헬싱키올림픽대회에는 육상 감독으로 참가했으며,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장, 대한체육회 상무이사, 국도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체육 분야에서의 활동 외에 사업가로서의 행적도 적지 않다. 집안이 유복했던 탓인지 퍽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다. 체육신문사를 차려 언론인이 되었는가 하면, 서울 용산지역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하기도 했고, 영화 제작에 투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사업은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영화 ‘홍길동전’ 제작으로 인해 큰 실패를 경험하였다.

 

잇따른 사업 실패로 인해 그의 말년은 퍽 곤궁했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던 그는 1980년 초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비록 아쉬움을 많이 남긴 하지만, 탁월한 기량으로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제패에 도전했던 그의 행적은 후배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제패도 김은배, 권태하 등 먼저 세계무대를 개척한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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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jiy*** 2014-04-16 답글답글
 

만약 2차 선발전에서 페이스를 잃은 김은배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대회에서 규정대로 실격이 되거나 페이스메이커를 하지 않았어도 선발이 되었을까요? 쓰다가 무서워서라기 보다 떳떳하게 선발되지 못한 것에 대한 양심때문에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편집자 2014-04-16 답글답글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이래저래 슬픈 역사입니다.


gole*** 2015-05-01 답글답글
 

옮겨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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