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ining Log

Total Dist 61,444.353 km Pace 6:14 min/km Speed 9.61 km/h
Current Dist 544.000 km Pace 5:35 min/km ↑ Speed 10.73 km/h ↑
  • 마라톤정보
  • 대회일정
  • 트레이닝로고
  • 대회참가사진
  • 대회참가기
  • 사진기록증
  • 통합기록검색
  • 자유게시판
  • 초특가 경매
  • Shopping Mall
Today
0
Total
38,241,239
회원가입 ·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엑셀파일 업로드 하기! 기록업로드 따라하기
2016 춘천마라톤 & 중앙마라톤 참..
2016 서울국제마라톤 참가기 쓰기..
전체보기
[참가사진] 제15회 세종특별자치시복사꽃마라톤 참가사진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참가사진] 2017 여의도벚꽃마라톤 참가사진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참가사진] 제6회 행복한가게마라톤 참가사진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참가사진] 어반애슬론서울 2016 참가사진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참가사진] 제16회 홍성마라톤 참가사진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전체보기
러닝가이드 - 뉴스
한국마라톤 10년을 지배한 불세출의 스타 문흥주
편집자   등록일 : 2014-07-19 오전 2:58:27

 

   70년대 중반 한국 마라톤 기록을 진일보 시킨 문흥주는 1949년 전남 광산군 비아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할머니와 아버지를 닮아 건강하고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며 학업을 병행하는 고생스러운 유년을 보낸 그로서는 운동을 시작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육상에 두각을 보인 것은 다소 늦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개교기념일에 열린 교내 10km 단축마라톤대회에 나가 육상 코치를 받던 유망주와 경합을 벌인 끝에 막판 스퍼트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달리기에 소질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그로서는 막연히 꿈만 키울 수밖에 없었다. 따로 훈련도 못 하고 1년에 한 번 3.1절 기념 단축마라톤대회에만 참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21세 되던 1970년 전남도민체전 20km 단축마라톤에 참가해 일반부 2위를 차지하며 도 대표선수로 발탁되었다. 비로소 그에게 본격적인 마라톤 선수로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독학으로 익힌 마라톤, 21세 청년의 인생 바꿔 

 

그해 10월에 열린 전국체전에 마라톤 풀코스에 참가해 2시간 32분대의 기록으로 7위를 차지한 그는 일약 전남의 육상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전남 육상이 워낙 침체되어 있던 터라 8위도 대단한 것이었다. 전국대회에서 10위 안에만 들면 직장을 잡아준다는 약속까지 있었던 상황이었다.


약속대로 문흥주는 광주 공설운동장에 기능직으로 입사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진학도 뒤늦게 이룰 수 있었다. 지도자도 없이 혼자 연습해 이룬 쾌거였다. 조대부고에 입학한 뒤 당시 육상코치를 맡고 있던 김정호 선생 지도로 동계훈련을 받은 그는, 실력이 급격히 향상되어 일약 전국 톱클라스 수준으로 성장했다. 특히 5000m와 10000m 종목은 전국무대를 주름잡을 정도였다.


1972년 경부역전경주대회 최우수상을 거머쥐는 등 고교육상의 왕자로 군림한 그는 1973년 건국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5000m와 10000m 종목을 휩쓸다시피 했다. 특히 입학하던 해 참가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9분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김차환이 1위)하면서 한국 마라톤의 차세대 스타로 떠오르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같은 해 10월에 열린 전국체전 마라톤에서는 그의 성적이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관심을 넘어 협회 임원간의 다툼으로까지 번지는 지경이었다. 한쪽은 그가 반드시 출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 쪽은 한 달 뒤에 열리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위해 출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대회당일 아침까지도 계속되어 출발 시간이 임박해서야 출전하는 쪽으로 합의가 되었다. 문흥주는 ‘윗분’들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몸도 못 풀고 있다가 느닷없이 레이스에 임했다. 워밍업이 안 돼 초반 고전을 면치 못한 그는 반환점을 돌면서 선두로 나서 30km 지점까지 2위와 1km 이상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스퍼트가 너무 과했던 탓인지 후바에 가서는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2위로 달려오던 박창열이 가시거리까지 추격해온 상태였다. 이 모습을 보면서도 힘을 내지 못한 문흥주는 120m 남긴 지점에서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그에게 불과 50m를 남겨둔 지점에서 추월당해 통한의 준우승에 머물렀다. 기록도 제 기량보다 저조한 2시간 22분대였다. 실로 보기 드문 극적인 패배를 당하는 바람에 경기가 끝나기 전에 전송된 우승 축하 전보가 경기 후 그에게 전달되는 헤프닝도 벌어졌다. 레이스로 인해 한 달 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부진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한국 마라톤 평정하고 10년간 왕좌에 군림하다


본의 아니게 쓴잔을 마신 문흥주는 동계훈련을 통해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1974년 봄 동아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쌀쌀한 날씨 속에 시작된 레이스에서 그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달려나갔다. 불과 50일 전에 한국 기록(2:16:26)을 세운 선배 조재형이 초반부터 스퍼트를 하자 그도 처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그런데 10km 정도 달린 시점에서 갑자기 조재형 선수가 레이스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바람을 안고 홀로 선두를 달려야 했다. 경쟁자가 없어 더 힘이 들었다. 다행히 3~4km 정도를 달리자 부산 출신의 김운수 선수가 따라붙어주었다. 문흥주는 반환점을 돌면서 다시 스퍼트 하여 독주체제를 굳히고 그대로 1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2시간 16분 15초. 새로운 한국 기록이었다.

선배 조재형에 이어 그해 두 번째로 작성된 이 기록은 무려 10년간이나 깨지지 않고 한국 마라톤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문흥주는 이후에도 꾸준한 훈련을 통해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본인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그의 기록을 위협하는 후배도 나타나질 않고, 언론의 관심은 홀로 분투하는 그에게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후인 197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 진정한 마라토너 문흥주

 

문흥주는 은퇴 후 마리아해 고등학교와 학다리 고등학교에서 7년간 교편을 잡고 1984년 국군체육부대 감독으로 부임해 후진을 양성했다. 지칠 줄 모르고 뛰었던 선수시절처럼 그는 20년간이나 지도자의 길에 투신했다. 이성근, 정만화, 김재룡, 한재호, 진수선, 백승도, 김이용 등이 다 그의 손을 거친 선수들이다.


선수로서의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 난 마라토너였다고 할 수 있다. 중장거리 레이스에 능하면서도 지구력 역시 탁월한 노력파였다. 그럼에도 조기에 육상을 시작하지 못하고 학창시절 지도자로부터 전문적인 코칭을 받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 마라톤사에 있어서도 문흥주의 존재는 크다. 조재형에 이어 16분대 한국기록을 내면서 당시 마라톤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단,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는 기록 차이가 있어 올림픽 무대에 서지는 못했다.


문흥주는 지도자의 자리에서도 은퇴한 뒤 동호인 주자로 변신하여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2시간 50분 아내 기록을 달성했고, 60대 중반을 넘긴 지금도 연령대별 시상식에서 매번 시상대에 오를 정도로 꾸준한 주력을 유지하는 중이다. 선수시절 지겹도록 달리고 또 달렸을 터인데도 마라토너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로 달리기 외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엘리트와 마스터스 러너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Copyrights ⓒ 러닝가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에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다음기사 가을 풀코스 제대로 뛰고 싶다면 이들과 함께! 편집자
이전기사 달리지 않는 사람을 배려해야 진짜 마라톤이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