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가이드

편집자 주 : 필자 박성배(52) 씨는 40대 중반까지 등산 마니아였다가 홧김에 마라톤 동호인과 벌인 하프마라톤(2005) 내기에 이기면서 마라톤 마니아가 됐다. 2007년에 서브3를 달성했고 2010년엔 보스턴마라톤 참가를 계기로 세계 5대 메이저 마라톤 서브3완주 도전을 시작했다. 같은 해 베를린마라톤과 뉴욕마라톤, 2011년 런던마라톤과 시카고마라톤에서 모두 서브3 기록을 달성해 도전에 성공했으며 한국기록원으로부터 한국 최초임을 인증 받았다(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사례는 없음). 이후 기 완주한 도쿄마라톤이 메이저대회에 편입되면서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 완주자가 되었다. 현재는 ‘전 세계 골드라벨 마라톤 서브3 완주’를 목표로 세계 각지를 누비는 중이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시간 45분 48초다.

“전 세계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 왜 그런 도전을 하게 됐나요?”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오면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게 된다. 장황해질 수 있는 답변을 간추리기 위해서다. 처음 동기는 단순했다. 세게 6대 메이저대회 서브3 완주에 성공했으므로, 도전의 범위를 확장시켜 새로운 도전거리를 만든 것이다. 하나 둘씩 대회를 늘려가다 보니 다른 이유도 생겼다. 세계 유수의 마라톤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 단지 여행이나 비즈니스를 통해서는 볼 수 없는 그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42.195km 레이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즐거움은 결코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애로사항은 물론 있다. 나의 도전은 관심과 응원을 바라기가 어렵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일부 우수 대회에 골드․실버․브론즈 라벨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마라톤 마니아들 중에도 모르는 이가 많은 형편이다. 가까운 지인이나 마라톤 골수 마니아들의 격려에 만족해야 한다. 골드라벨 대회 리스트가 해마다 바뀜으로 인하여 도무지 언제쯤 끝장이 날 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도 도전을 힘들게 한다. 이미 뛴 대회가 골드라벨을 박탈당하기라도 하면 그 허탈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문제는 체력이다. 전 세계를 누비며 매번 서브3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직업선수 못지않은 몸 관리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낯선 코스와 기후, 음식과 시차가 모두 기록을 갉아먹어버린다. 해마다 나이가 많아지고, 계속된 원정으로 인해 지쳐간다. 점점 몸 관리가 쉽지 않다. 실제로 올해 3월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치러지는 로마마라톤과 파리마라톤을 연달아 완주할 계획이었는데 감기몸살의 여파로 모두 망치고 말았다.(로마대회는 중도 포기, 파리대회는 불참)

최고의 컨디션으로 맞이한 암스테르담 & 프랑크푸르트 원정

한 번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겪었기에 올해 하반기 암스테르마라톤과 프랑크푸르트마라톤은 준비과정을 더욱 철저히 했다. 6월 말부터 토․일요일에 남산순환로 6km 코스를 3회씩 소화했고, 8월 중순에는 7회까지 늘리면서 강훈련을 했다. 한여름 8월에 열린 사천노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50분대를 찍을 정도로 몸이 일찍 만들어졌다. 가을로 접어들었을 때, 원정을 기다리는 마음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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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금요일.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인천을 출발하여 오후 7시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별다른 일정 없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엑스포장 ‘스포트할레 주이드(Sporthallen Zuid)’로 이동했다. 그동안 경험했던 골드라벨 대회에 비해 아담한 규모이고 인파로 북적거리지도 않았다. 번호표와 기념품 셔츠를 수령한 뒤 한가롭게 스포츠브랜드 전시부스를 둘러보았다. 마라톤 전문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지 않고 혼자 갔기 때문에 다음날 대회를 생각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대회 당일인 19일. 컨디션은 여전히 괜찮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7시 30분쯤 숙소를 나섰다. 천천히 걸어서 45분경 대회장에 도착해보니 대회 당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한산했다. 8시가 가까워서야 러너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8시 20분쯤 자원봉사자들이 각자 위치에 배치되어 대회장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한참 기다린 끝에 물품보관을 하고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가니 그곳에서도 뭔가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냥 각자 몸을 풀면서 대기하는 식이었다.

9시 30분에 A․B그룹이 출발했다. B그룹에 속한 나는 2000명 대열의 뒤쪽에서 레이스를 시작했다. 2차선에 불과한 주로는 초반에 추월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킬로미터당 3분 55초 페이스로 달려야 목표하는 ‘2:45’ 기록을 낼 수 있는데 그에 한참 못 미치는 페이스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2~3km 정도 달리자 주자간 간격이 벌어졌고, 나는 서서히 추월하면서 내 페이스를 찾아갔다.

컨디션이 너무 좋으면 부상 온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초반이지만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가볍고 호흡도 안정되어 순조롭게 레이스가 진행됐다.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이 부채꼴 모양의 도시 암스테르담은 세계적인 관광도시답게 시시각각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주었다. 응원하는 시민들이 별로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세상에 완벽한 대회가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대회를 즐겼다. 경쟁적인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도 마음은 마냥 행복하고 뿌듯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대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5km를 통과하며 기록을 보니 킬로미터당 평균 4분 12초(구간기록 21분)였다. 예상했던 기록보다 40~50초 정도 뒤진 기록이어서 페이스를 조금 더 올려보기로 했다. 마침 끌어올린 페이스와 비슷한 주자가 눈에 띄어 나란히 뛰면서 레이스를 즐겼다. 아!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왼쪽 종아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부위는 대회를 앞두고 인터벌트레이닝을 하다가 처음 통증을 느낀 곳이었다. 당시엔 상위권 러너들이 훈련 과정에서 흔히 겪는 잔부상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이후 훈련과 대회에서 어느 정도 통증이 있어도 경기력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통증의 강도가 전혀 달랐다.

‘아… 왜 대회 전에 테이핑을 하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다음 5km 구간을 19분 32초에 끊었고, 그 다음 5km는 19분 48초를 기록했다. 그러나 15km 이후로는 앞바람이 심해져 페이스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속도가 비슷한 10여 명의 주자들 틈에 끼여 서로를 방패막이 삼아 달렸다. 강풍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지만, 이번엔 앞뒤에서 달리는 2m대 장신 주자들이 문제였다. 리치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스텝이 서로 엇갈려 부딪치기 일수였다. 20km 지점까지 5km 기록은 20분 25초로 다시 느려졌다.

20km이후부터 다행히 뒷바람이 불었다. 똘똘 뭉쳐서 달리던 주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뒤처진 기록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속도를 올렸다. 21~22km 지점을 지날 즈음 참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하프 통과기록은 1시간 24분 20초. 이미 ‘2:45’ 달성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무리를 해서 서브3를 달성하느냐 레이스를 포기하느냐의 판단이 남아있었다. 25km 지점을 지날 때는 통증이 극심해서 레이스 포기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포기를 하려니 차마 발이 멈춰지지를 않았다. 어린 딸이 올 봄 로마마라톤 때 했던 애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끝까지 뛰지 않을 거면 뭣 하러 여기가지 왔어? 장애인들도 열심히 휠체어를 굴려서 완주하는데 아빠는 중간에 포기하고 나와?” 한국에 돌아가서 비슷한 말을 또 듣겠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종아리에 파스를 바르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범벅된 레이스, 나는 왜 달리고 있는 걸까?

한 발 한 발 뛸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느끼면서 달리고 있나. 무엇을 위해서인가? 나를 위해서, 아니면 딸 솔이를 위해서인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왔다는 사명감으로 완주를 하려는 건가?’ 부질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통을 에너지 삼아 달렸다. 20km 이후 5km 구간기록은 20분 16초(~25km), 22분 26초(~30km), 22분 08초(~35km), 22분 33초(~40km)로 조금씩 느려지면서도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혼자만의 사투 때문에 30km 이후 펼쳐지는 운하들의 장쾌한 풍경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아름 다운 거리의 모습도, 시민들의 응원도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잔상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만이 두 다리를 움직였다. 약 4km 정도를 남기고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한 느낌의 공원으로 접어들자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질주했다. 그게 기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내야 후련할 것만 같았다. 고통 속에서도 골인지인 올림픽스타디움이 보이자 힘이 솟았다. 질주, 질주, 질주…. 후회 없이 달렸다. 후반엔 기록마저 잊고 달렸는데 2시간 57분 30초가 찍혀있었다.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서브3 완주였다.

결승선을 넘자 한 걸음도 더 디딜 수가 없었다. 의무실로 실려가 간단한 치료를 받았지만 응급처치에 불과해서 통증을 줄일 수는 없었다. 사진 한 장 찍을 여유도 없이 맡긴 짐을 찾아 옷을 갈아입었다. 어기적 어기적 운동장을 나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10분 안에도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종아리를 다친 나는 80대 노인보다 굼떴다. 장장 50분간에 걸쳐 달릴 때보다 더 심한 고통과 싸운 끝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사서 방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앉아서 커피 한 잔으로 무사히 완주한 것을 자축하는 쓸쓸한 축배를 들었다.

프랑크푸르트마라톤 참가나 관광은 고사하고 호텔 로비를 거니는 것조차 불가능해서 어렵사리 비행기표를 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시간 비행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까지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단단히 고장이 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종아리근육 파열로 6주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빨리 낫는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의사 말대로 아예 가만히 있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가벼운 조깅조차 삼가고 가을 시즌을 다 보냈다. 재발되면 장기화될 수 있는 부상이라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긴 휴식기를 보내는 중이다. 돌이켜보면 암스테르담마라톤 5~10km 구간이 선택의 순간이었다. 포기했다면 4개의 골드라벨 대회를 연달아 망치는 대신 부상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달리는 것을 선택해 1개의 골드라벨 대회를 서브3 기록으로 완주하고 한쪽 종아리를 망가뜨렸다. 내 선택은 바보 같은 것이었을까?

포기하는 쪽이 현명한 판단이었을지 모르지만, 도전 성공 외에 보너스로 얻은 것도 있다. 어린 딸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마지막 스퍼트에서 느낀 전율이 그것이다.

[마라토너 박성배의 해외마라톤 완주 기록]

2008년   도쿄마라톤   2시간 56분 17초   골드라벨
2009년   이브스키마라톤   3시간 18분 10초(건타임)
2010년   보스턴마라톤   2시간 58분 43초   골드라벨
2010년   베를린마라톤   2시간 51분 26초   골드라벨
2011년   런던마라톤   2시간 53분 20초   골드라벨
2011년   뉴욕마라톤   2시간 48분 58초   골드라벨
2011년   시카고마라톤   2시간 49분 21초   골드라벨
2012년   도쿄마라톤   2시간 53분 14초   골드라벨
2012년   보스턴마라톤   3시간 06분 26초   골드라벨
2012년   리우데자네이루 2시간 55분 22초   골드라벨 취소
2012년   호놀룰루마라톤 2시간 55분 13초   골드라벨 취소
2013년   샤먼마라톤   2시간 56분 52초   골드라벨
2013년   프라하마라톤   3시간 06분 23초   골드라벨
2013년   베이징마라톤   2시간 51분 14초   골드라벨
2013년   아테네마라톤   2시간 59분 06초

2014년 암스테르담마라톤 2시간 57분 30초 골드라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