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세계마라톤기록 변천사에 단 한 번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20년 8월 앤트워크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그것이다. 올림픽 재패와 세계신기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주인공은 핀란드의 육상영웅 요하네스 콜레마이넨(Johannes Petteri Kolehmainen / 1889. 12. 9 ~ 1966. 1. 11)이다. 사실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알아주는’ 육상 스타는 파보 누르미(Paavo Nurmi)지만 ‘마라톤 스타’라는 타이틀에는 당대 중장거리와 마라톤에서 세계를 평정한 콜레마이넨이 더 어울린다.

요하네스 콜레마이넨은 핀란드의 한 소도시 쿠오피오에서 자랐다. 모두 5형제가 집에서 40km나 떨어진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모두 뛰어서 출퇴근을 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달리기 어려우면 스키를 타고 다녔다. 콜레마이넨은 약 100km 떨어진 곳에 일을 보러 가면서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간 적도 있었다. 훈련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이미 울트라마라톤에 버금가는 훈련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형제 중 한 명인 타투 콜레마이넨도 육상 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함께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으나 무더위 때문에 불과 3km를 남기고 기권한 일화가 전해진다.

올림픽 3관왕 오른 원조 ‘트랙의 신화’

요하네스 콜레마이넨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는 대부분 올림픽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대한 것들이다.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1912년 열린 스톡홀름올림픽은 콜레마이넨을 육상 역사에(특히 핀란드의 스포츠사에) 영원히 기억되도록 해준 대회였다. 그는 매우 미국에 있는 아버지와 형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혁신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거쳤다. 체중을 무려 13kg이나 감량해 50kg의 가벼운 몸을 만들었고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정신적인 부분까지 무장했다.

그렇게 ‘준비된’ 스타는 올림픽 무대에서 실로 독보적인 기량을 발휘했다. 먼저 10000m 선발전에 출전한 그는 33분 49초의 좋은 기록을 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결승에서는 더욱 저력을 발휘해 31분 20초로 조국 핀란드에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다.

불과 48시간 후에 열린 5000m 예선전에서는 15분 34초 6의 좋은 기록으로 통과했지만 당시 라이벌인 장 부앵(프랑스)은 15분 05초의 올림픽신기록을 찍으며 한발 앞서나갔다. 때문에 7월 10일 열린 5000m 결승전에서는 두 선수의 엄청난 접전이 벌어졌다. 두 선수가 다른 참가자를 앞도한 가운데 무려 16번이나 선두가 바뀌는 혈투였다.

콜레마이넨은 막판에 뒤처지는 듯했지만 결승점을 불과 25m 남기고 극적인 역전에 성공하면서 금메달 획득에 성공했다. 2관왕이라는 성적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기록이었다. 당시 세계기록은 영국의 아서 로버츤이 1908년 세운 15분 01초 2였는데 콜레마이넨은 이는 25초나 경신한 14분 36초 6을 찍으며 이 부문 최연소 세계기록보유자가 됐다. 아쉽게 2위를 차지한 장 부앵은 불과 0.1초 뒤졌고, 3위는 15분 07초대 기록에 머물렀다. 이 두 사람이 당시로서 얼마나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것인지 기록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콜레마이넨은 이에 그치지 앟고 1.2km 크로스컨트리 개인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추가했다. 또 단체전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은메달을 획득했다. 만약 핀란드 팀의 전력이 보다 강했다면 그는 육상 4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장거리 재패하고 마라톤 지존이 되다

올림픽에서의 영광을 맘껏 누리기도 전에 세계 정세는 험악해졌다. 불과 2년 뒤인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제대로 된 훈련과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그러나 1918년 종전 후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도 벨기에가 앤트워프올림픽을 강행함으로써 많은 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게 됐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29개국 2668명이 참가해 열띤 경합을 벌였다.

마라톤으로 전향한 콜레마이넨은 이 대회에서 2시간 32분35초의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한 번 당대 최고의 러너임을 증명했다. 트랙 종목을 재패하고 마라톤으로 전향해 정상에 오른 과정은 마치 ‘트랙의 신화’로 불렸던 게브르셀라시에의 경우를 연상케 한다. 그만큼 뛰어난 스피드를 가졌던 덕분인지 콜레마이넨의 기록은 1913년 이후 깨지지 않았던 2시간 36분 07초를 크게 경신할 수 있었고 이 기록은 후대의 선수들이 2시간 20분대로 진입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사실 앤트워프올림픽에 참가한 핀란드 선수 중에는 콜레마이넨보다 훨씬 주목받는 신예가 있었다. 핀란드 육상의 상징으로 불리는 파보 누르미(Paavo Nurmi)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했고, 1924년 파리올림픽에서는 무려 5관왕에 올랐다. 이후 참가한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보태 금메달만 9개(은메달3개)를 획득하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2살부터 가난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아마추어 선수임에도 돈을 받아야만 올림픽에 출전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돈 버는 기계’라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1932년에는 올림픽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핀란드 역사상 최고의 육상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4개의 메달에도 뭇을 수 없었던 사연

다시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으로 돌아가보자. 5000m 시상대에 오른 콜레마이넨은 세계신기록을 세운 금메달리트답지 않게 기뻐하기는커녕 슬픔에 잠겨있었다. 핀란드 국기 대신 적국이나 다름없는 러시아 국기가 계양되는 것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핀란드와 러시아의 상황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와 비슷했다. 러시아의 통치를 받으면서 핀란드인들은 꾸준히 항거를 했고 러시아 총독이 암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핀란드 의회가 독립을 선언한 것도 우리의 독립운동과 닮았다.

이 정치적 상황은 스포츠 행사에서도 여지없이 적용됐는데, 이전까지 핀란드 선수들은 종주국 제정 러시아의 깃발을 들고 올림픽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스톡홀름올림픽에서는 대회 직전에 ‘자국의 깃발을 들고 참가하지 않는 한 올림픽에 출전할 수가 없다’고 버텼다. 결국 러시아와 IOC가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깃발 없이 핀란드 국명이 쓰여진 팻말만 들고 입장하기로 타협했다. 이 약속은 지켜졌으나 정작 시상식 때는 러시아 깃발이 계양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콜레마이넨은 시상대에서 ‘차라리 이기지 말았어야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 후 선수로서의 콜레마이넨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의 신문기사 등을 보면 그가 미국의 국립경비대에 들어갔고 1921년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고 기록돼 있다. 자세한 정황이야 알 수 없지만 식민지 국가의 육상 영웅으로 사는 것이 고달파서가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의 정신적 지주였던 손기정 선생이 일제 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일본 유학(사실상 유배)길에 올랐던 것처럼 정치적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외에 알려진 사실은 별로 없다. 다만 1952년 고국 핀란드에서 열린 헬싱키올림픽에서 노년의 콜레마이넨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의 육상 영웅 파보 누르미가 건재한 모습으로 성화를 성화대로 옯겼고, 이를 건네받은 63세의 콜레마이넨이 계단을 뛰어올라 점화를 했다.
가슴 속 깊이 아픔을 지닌 핀란드의 영웅은 고국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4년 후인 1966년 1월 11일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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