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와 실업팀은 물론 여자국가대팀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지도자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마라토너 유재성(56)은 한국 마라톤 역사상 두 번째로 2시간 14분 벽을 넘어서며 1980년대를 풍미한 건각이다. 경남 사천에서 내어난 그는 바다가 인접한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지만 운동부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가 중학교(용남중) 3학년 때 교내 5km 대회에서 우승하며 마라토너의 꿈을 키우게 됐다.

고등학교(용남고)에 올라가서도 교내 10km 단축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육상부도 코치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달리기 연습에 몰두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대회 출전 기회도 적었는데 3학년 때 전국대회에 나가 20km 부문 10위와 5000m 부문 3위를 차지한 것이 거의 유일한 ‘경력’이었다.

실업팀 생활 6개월 만에 정상에 선 무명의 졸업생

유재성은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해 마라톤을 하고 싶어 했으나, 변변한 대회 성적이 없었기에 손을 내미는 대학도 나타나질 않았다. 결국 그를 스카우트 한 팀은 신생팀 동양나일론이었다. 국가대표를 지내고 창단 팀 사령탑을 맡은 손금용 선생이 그를 불러들였던 것. 이 때가 1979년이었다.

뒤늦게 제대로 된 팀과 지도자를 만난 그는 잠재되어있던 재능을 단기간에 펼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팀 내 어느 선수도 경쟁자로 여겨주지 않았으나, 팀 훈련에 참여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전국대회에 나가 5000m, 10000m 종목 우승을 거머쥔 것이었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그는 일약 차세대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국가대표로 뽑히기에 이르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해와 이듬해에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2연패를 달성하는 등 국내 정상급의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 참가한 <제61회 전국체육대회> 10000m 종목에서는 30분 45초 4를 기록하며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하기도 했다.

그렇게 화려한 2년을 보내고 1981년 군 복무를 위해 육군3사관학교 마라톤 팀(국군체육부대 마라톤 팀 전신)에 들어간 그는 희대의 명장 고 정봉수 감독을 만나게 된다.

마라톤 황금기에 ‘동마’ 2연패로 역사에 길이 남다

명 조련사 정봉수 감독이 이끄는 육군3사관학교 마라톤 팀에 둥지를 튼 유재성은 그해 <전국체육대회> 10000m 준우승(30:07.6)과 1983년 <제37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 10000m 우승(29:51.8), 5000m 준우승(14:22.34)을 차지하는 등 발군의 기량을 과시했다. 풀코스 기록도 꾸준히 향상시켜 1984년 열린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는 2시간 16분 21초를 기록했다.

유재성은 1984년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체육대학에 입학했다. 고교 졸업 후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 못하면서 대학 진학이 좌절된 그로서는 퍽 의미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대학생 신분으로 운동과 대회 참가를 하면서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 되던 1985년부터 그는 선수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마라톤 사에 남을 기록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985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유재성은 이 대회에서 당시 한국기록에 바짝 다가선 2시간 15분 48초로 우승하며 기록 경신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벌어진 1986년 <동아마라톤>은 <서울아시안게임> 마라톤 대표선수 선발전을 겸해 치러진 중요한 시합이었다. 유재성은 반영만, 정만화 등 쟁쟁한 라이벌들과 초반부터 빠른 페이스를 유지하며 레이스를 이끌었다. 3명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레이스는 종반까지 접전이었고, 결승점을 불과 100m 남긴 상황에서 유재성이 스퍼트를 했다.

이 막판 질주를 나머지 두 명이 따라잡지 못하면서 유재성은 대회 2연패를 차지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2시간 14분 06초라는 뛰어난 기록을 작성해 종전까지 이홍열이 가지고 있던 한국기록을 뛰어넘었다.

이 레이스는 한국 마라톤 역사상 보기 드문 명승부였다. 기존의 국내 경기와는 달리 선두권을 형성한 선수들이 스피드 중심의 레이스를 이끌었고, 유재성은 막판 스퍼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현대적인 마라톤 경기의 모델을 제시한 시합이라는 평도 받았다. (이 때 7초만 더 당겨 13분대 기록을 냈다면 7000만 원의 포상금도 탈 수 있었다.)

80년대 한국 마라톤을 이끈 일등공신

유재성은 같은 해 열린 <서울아시안게임>에 정만화와 함께 출전하여 2시간 16분 55초로 동메달을 따 냈다. 기록상 10분 벽을 넘은 일본의 나카야마와 다니구치가 출전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동메달이 점쳐지긴 했지만 그는 한국 대표로 선전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1988년에는 <동아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2시간 12분 49초로 2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기록을 대폭 앞당기기도 했다. 비록 이 때는 한국 기록을 이종희가 가지고 있었지만, 유재성은 여전히 국내 정상급의 마라토너이자 스타였다.

그해 열린 <서울올림픽> 마라톤에서 그는 한국을 대표해 뛰었다. 그 스스로 “내 인생의 마지막 승부라는 생각으로 뛰었다”고 술회할 만큼 그의 각오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정상급의 선수들과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제 기량도 나오지 않아 31위에 그쳤다.

유재성은 1989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명지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제일제당 마라톤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시절 놀라운 끈기와 집념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지도자로서도 빛을 발해 허의구, 송재필, 형재영, 이선춘 등 걸출한 육상 스타를 길러냈다. 현재는 부산체육고등학교에 둥지를 틀고 꿈나무 선수 육성과 지역 체육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80년대는 한국 마라톤이 진퇴양난에 빠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계기록과는 차이가 벌어져 있었고 국내 선수들이 이를 좇아가는 속도는 너무 느렸다. 그래서 체육계는 과연 마라톤에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딜레마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 와중에 유재성은 한국 기록을 경신하고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분전했다. 국내?외 대회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다른 국내 선수들이 더 나은 기록을 낼 수 있도록 견인한 것도 그였다.

뒤늦게 안타까운 것은 그처럼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선수가 고교 졸업 때까지 마땅한 지도자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달리기 폼은 좋지 않은 편에 속하는데, 이는 오랜 기간동안 혼자서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실업팀에 와서는 폼이 이미 몸에 익어버려서 고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 같다. 많은 육상인들은 그가 우수한 폼만 미리 익혀두었다면 더욱 눈부신 기록을 작성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