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라톤이 세계 속에서 활약해온 전과에 비하면 그 업적을 이룬 선수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기회는 늘 부족했다. 마라톤이 생활체육으로 자리를 잡은 지금도 대중들은 故손기정 선생이나 황영조 선수 정도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3.1절에 즈음하여 일제 강점기에 세계무대에서 민족혼을 불사른 최초의 마라토너 故권태하 선생의 삶을 반추해보자.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권태하(1906~1971)는 부유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으며 여려서부터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충주 교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했다가 일본 리쓰메이칸중학교로 전학해 럭비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동년배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뛰어났을뿐 아니라 특히 스피드가 좋아서 육상선수로 전향하라는 권유를 자주 받았다.

실제로 그는 육상 중거리 종목에서 정상급 기량을 발휘했고 장거리 종목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권태하는 세계무대에서 한국인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종목은 마라톤이라고 보고 명치대학에 진학하면서 마라톤 선수로 전향했다. 당시로선 다소 늦은 입문이었지만 1932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27세 나이로 LA올림픽에 도전했다.

대학시절 마라톤 입문…일제 방해 속 올림픽 티켓 획득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에 한국인 선수가 일본선수와 경쟁하여 대표로 선발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선발전에서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해 일본선수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고 이미 끝난 선발전을 다시 여는 경우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권태하는 최종 선발전 직전 감기에 걸렸는데 의사가 잘못 된 약을 처방하는 바람에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우승을 차지해 후배 김은배, 일본선수 쓰다와 함께 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역사상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출전이었다.

배를 타고 장장 20일간의 여정 끝에 LA에 도착한 대표선수단은 매우 지쳐있었다. 특히 권태하의 상태가 안좋았다. 공식기록 2시간 31분대, 연습에선 2시간 28분대까지 나왔던 그는 우승까지 바라볼 수 있는 선수였지만 감기와 여독으로 5kg 이상 체중이 줄어들어 제 기량을 내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감기몸살로 5kg 빠져… 엉망인 몸 상태로 투혼의 레이스

여비를 아끼기 위해 빠듯한 일정을 잡았으므로,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다. 권태하는 초반에 큰 무리 없이 선두권을 유지했지만 중반부터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쳐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절며 억지로 달렸다. 레이스가 7km 정도 남았을 때 권태하는 이미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순위도 남은 거리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결승점이 나올 때까지 달릴 뿐이었다.

권태하의 페이스가 느려지자 파죽지세로 달려온 그를 다른 선수들이 하나 둘 앞질러갔다.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선수가 2시간 31분 36초로 결승테잎을 끊었을 때, 권태하는 걷듯이 휘청거리면서 결승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배 김은배(6위)를 포함하여 8명의 선수가 골인하고 나서야 그는 경기장에 나타났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다리를 질질 끌며 달렸다. 그리고 결승점 10m를 앞두고 쓰러져버렸다. 의식이 희미해서 트랙에 그어진 흰 줄을 결승점으로 착각했다는 말도 있고, ‘이제 다 왔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어쨌든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거의 기어가듯 결승점을 통과했다. 눈물겹고 위대한 9위(2:42:52)였다.

힘겹게 한국치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레이스를 치른 권태하는 대회가 끝나고 나서도 귀국을 하지 않고 현지에 머물렀다. 레이스를 망쳤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다시는 선수로서 주로에 서지 않았지만 대신 후배들을 격려하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선수시절 눈여겨보았던 양정고보 학생 손기정에게 편지를 띄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이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할 때는 자비로 베를린 현지에 가서 일거수 일투족을 챙기고 함께 코스를 답사하며 감독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서 체육학 전공 후 해방 조국에서 후진 양성에 투신

권태하는 미국 사우드캘리포니아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했고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남북을 오가며 무역사업을 시작했고 본격적인 후진 양성도 시작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마라톤보급협회를 만들어 선수 관리와 육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 단체가 만들어짐으로써 보다 많은 선수들이 안정적으로 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보스턴마라톤을 재패한 서윤복 등이 대표적인 수혜자였다.

권태하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의 마라토너들과 늘 함께했다. 유복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노년에는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와중에도 마라톤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온몸으로 부딪쳐온 그는 ‘한국 마라톤의 대부’로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