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조심스레 추진됐던 케냐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 ‘귀화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이를 통해 침체된 한국 마라톤을 되살리고 2020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메달까지도 노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외모가 비슷한 아시아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 선수를 귀화시켜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어느 스포츠 종목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진행 과정에서 분명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부딪칠 것으로 보인다.

일단 귀화시킨다는 에루페 선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라톤 지도자 출신인 백석대 스포츠과학부 오창석 감독(대한육련 이사)이 발굴한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 케냐)는 2011년 경주국제마라톤과 2012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마라톤 커리어 전부를 한국 대회에서 쌓았다. 2012년부터 귀화 추진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가 금지약물 복용 파문에 휘말려 2년간의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올해 명예회복을 위해 서울국제마라톤을 다시 찾은 에루페는 2시간 06분 11초의 우수한 기록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귀화 추진 에루페, 한국이 발굴해 한국에서 성장한 친한파
최고기록 2시간 5분대… 안정된 환경에서 운동하기 원해

짧은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한국인에 의해 발굴돼 한국 대회를 통해 성장했고 스스로 한국 정착을 원하는 ‘친한파’다. 자신을 톱클래스 선수로 성장시킨 오창석 교수에게 두터운 신뢰를 가지고 있고,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2시간 5분대를 찍었는데도 더 큰 에이전트를 찾기 보다는 한국에서 안정적인 환경 속에 운동하기를 원한다. 한국 육상계로서는 이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만족하는 선수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냐 흑인 선수를 귀화시키는 일은 참 조심스럽다. 한국 역사에서 마라톤이라는 스포츠가 갖는 독특한 포지션 때문이다. 마라톤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열등의식에 대한 극복이며, 자존감의 발현이었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에 나치 국가에서 올림픽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서윤복과 함기용은 미국에 구걸하던 시대에 미국 육상의 상징인 보스턴마라톤 챔피언에 올랐다. 황영조는 경제규모로나 육상 수준으로나 우리를 압도했던 일본을 상대로 통쾌한 역전극을 펼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성기 때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남아공 선수(투과니)에게 3초차로 져 준우승한 이봉주는 37세 나이에 케냐 선수(키루이)를 막판에 제치고 우승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의 끈기를 보여주었다.

에루페가 한국기록을 내고 세계무대에서 입상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아주 독보적인 선수가 되었을 때(현재 기량으로 보면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그를 국민마라토너로 불러줄 수 있을까? 손기정, 서윤복, 함기용, 황영조, 이봉주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마라토너로 인정하고 한국 마라톤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한국 역사 속 마라톤의 특수성 감안하면 조심스러운 일
이왕 귀화 추진하려면 장기적 안목과 구체적 전략 있어야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에루페의 귀화를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귀화시키는 목적이 한국기록의 경신, 국제대회 메달 획득 등 단지 성적에 관한 것들이라면 목적을 이룬다 한들 그게 과연 얼마나 한국 마라톤에 도움 되는 일일까? 대한육련은 에루페의 활약이 기폭제가 되어 한국 마라톤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에루페의 귀화는 시도해봄직한 일이라 치더라도, 단순히 그가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낼 성적을 ‘케냐 폴더’에서 ‘한국 폴더’로 옮겨오겠다는 계산이라면 한국 마라톤과 에루페 모두에게 상처만 안겨줄 것이다.

에루페는 한국 선수들과 섞여서 동반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케냐에서 경험한 세계 일류 선수들의 훈련 노하우를 전수하고, 한국 지도자들에게선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배우며 조금씩 조금씩 한국선수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5~6년 후 전성기가 지나면 플레잉 코치를 거쳐 지도자로 키워야 한다. 케냐 출신의 검은 한국인 에루페는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훈련캠프와 교류하며 마라톤 훈련의 최신 경향을 수집하고, 현지의 유능한 선수를 한국으로 유학 또는 귀화시키고, 한국 선수가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도록 새로운 훈련법을 개발해야 한다.

에루페의 귀화 시도는 적어도 이 정도 여러 수 앞을 내다보고 둬야 하는 바둑이다. 만약 선수 자원의 한계로 인하여 육상계의 파이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 차원이라면 지금 바둑판을 엎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