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렌스 해리슨 디마(1888.6.7~1958.6.11)는 당대 육상 팬들(특히 미국)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행복한 마라토너다. 비록 세계기록을 작성하거나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그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보스턴마라톤’에서 무려 7회나 우승을 차지하며 마라톤의 아이콘이 됐다. 사람들이 미스터 디마라톤(Mr. DeMarathon)이란 별명을 붙여준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독보적인 인기를 누린 마라톤 스타인지 짐작할 만하다.

디마는 1888년 미국 오하이오주 마데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 청년기부터 65세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5차례나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했고 추승 7회, 준우승 3회, 3위 2회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을 거뒀다. 명실공히 보스턴마라톤을 대표하는 프렌차이즈 스타였다.

1910년(22세) 보스턴마라톤에서 마라톤 데뷔전을 가진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깜짝 준우승을 차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에는 지역에서 오래 된 저널이 그를 우승후보 중 하나로 주목했다. 본인 역시 대회를 앞두고 우승하는 꿈을 꿨다. 좋은 징조는 현실이 되어 2시간 21분 39초의 대회 신기록으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됐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1912년에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 마라톤(40.2km)에 출전했는데, 갑작스러운 폭염으로 인해 참가자 68명 중 절반이 기권해버린 이 대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네스 맥아더(2:36:54)가 우승했고, 디마는 2시간 50분 46초로 12위에 그쳤다.

20대를 날려버린 마라토너, 30대에 전성기를 맞다

올림픽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하더라도 디마는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젊은 스타였다. 그를 원하는 무대가 많았고, 육상 팬들의 기대도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마는 올림픽 무대를 끝으로 33세가 될 때까지 마라톤 무대를 사실상 떠나있었다. 장거리 러너로서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적기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가 훗날 자서전을 통해 밝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의사로부터 심장병이 있으니 더 이상 달려서는 안 된다는 권유를 받았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당시 의사가 지적한 ‘비정상적인 심장박동’이 고강도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스포츠 심장’의 특징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후 부검에서 죽상동맥경화증 소견도 있었지만 경미한 것이었다)

둘째는 종교적인 이유였다. 독실한 침레교도였던 그는 개인의 승리를 위해 달리기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당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육체의 기량을 겨루는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훈련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버몬트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며 유명 대학의 공개강좌를 들었으며 보스톤 지역에서 출판 업무를 맡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개인훈련을 하면서 짧은 거리 경주에만 참가하던 디마는 1917년 보스톤마라톤에 출전해 2시간 31분 5초로 3위를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마라톤 무대에 복귀하는가 싶었지만 곧 군대에 징집되면서 긴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진짜 마라토너로서의 삶은 마라톤 데뷔 12년만인 1922년에 시작됐다. 33세의 나이. 다른 장거리 주자들이 슬슬 은퇴를 고민할 만한 나이에 그는 보스톤마라톤에서 2시간 18분 10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생애 2번째 우승을 일궈냈다. 여세를 몰아서 1923년(2:23:47)과 1924년(2:29:40)에도 우승을 차지해 보스턴마라톤 3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보스톤마라톤만 7회 제패, 살아있는 전설이 되다

사실 1924년의 우승은 당시 42.195km 코스의 세계최고기록이었다. 그러나 훗날 코스 길이가 다소 짧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기록 작성자’의 영광은 1년 뒤 2시간 29분 02초를 작성한 알버트 미첼슨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디마가 불운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같은 해 열린 파리올림픽 마라톤에서 핀란드의 앨빈 스탠루스(2:41:22), 이탈리아의 로미오 베르티니(2:47:19)에 이어 2시간 48분 14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미첼슨은 그보다 훨씬 좋은 기록을 작성하고도 올림픽 메달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디마는 이후 2년간 신예들에게 밀려 보스톤마라톤 우승을 놓쳤지만 1927년에 다시 2시간 40분 22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도 2시간 37분 07초로 우승했다. 마지막 우승은 2시간 34분 49초를 찍은 1930년 대회였다. 이로써 보스턴마라톤을 통해 데뷔한 지 20년 만에 한 대회 7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금자탑이 완성되었다. 특히 마지막 우승은 마스터스로 분류되는 41세 나이에 이룬 것이어서 더욱 주위를 놀라게 했다.

20대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내로라하는 러너들을 압도한 스타였지만 그의 훈련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평소에는 11km 정도, 일을 하지 않을 때는 20km 정도를 킬로미터당 5분 페이스로 달렸다. 스피드훈련은 따로 하지 않고 10마일(약 16km)경주에 참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총 훈련량은 1주일에 160km 정도였다.

죽기 직전까지 마라토너로 살다 간 불세출의 스타

1929년에 늦깎이 결혼을 한 디마는 인쇄기술을 가르치고 청소년 캠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학업에도 뜻이 있어서 1934년 보스톤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문 선수로서의 생활을 접은 후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65세까지 보스톤마라톤에 출전했고, 69세에도 15km 레이스를 소화했다. 그가 70세 되던 1958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인이 된 이후 죽기 직전까지 마라토너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정상급 기량을 중년까지 유지했던 클라렌스 디마의 삶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었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 피로 실험실은 디마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러닝머신을 달리는 동안 신체 변화를 관찰하는 이 실험은 전설적인 생리학자 데이비드 딜이 맡았다. 실험 결과 디마는 러너가 오랜 시간 빨리 달리기 위해 필요한 요소 즉, ‘운동 중 낮은 젖산 수준’ ‘높은 젖산 전환점’ ‘강한 심장과 매우 높은 최대산소섭취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마라톤 대회에서 발생하는 생리학적 스트레스 요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자료였다. 이 실험으로 인해 과학적인 마라톤 훈련법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현대 스포츠의학의 탄생을 앞당길 수 있었다. 당대의 육상 팬들을 열광케 하고, 후배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스포츠의학의 발전을 앞당긴 그는 단지 보스턴마라톤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세계 마라톤사를 빛내는 몇 안 되는 스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