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세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1, 2차 세계대전은 스포츠의 역사에도 곳곳에 멍자국을 남겨놓았다. 식민지 국가의 선수는 국적이 바뀌기도 하고, 약소국의 경기 기록이 무시되기도 하며, 의도를 알 수 없는 왜곡이 생기기도 했다. 마라톤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마라톤 사에는 1935년부터 10여 년간 일본과 한국이 천하를 호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묘하게 어긋난 전후사정 때문에 누구도 속 시원히 당시의 화려했던(?) 시절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가장 보편적으로 전해지는 세계마라톤기록 변천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스즈키 후사시게[1914. 2. 15 ~ 1940(추정)]가 1935년 3월 31일  2시간 27분 49초를 기록해 아시아인 최초의 마라톤세계기록 작성자가 된 것으로 나온다. 이어 동갑내기 라이벌 야스오 이케나카[1914. 3. 3(추정) ~ 1992. 3. 14]가 3일 후인 4월 3일 2시간 26분 44초를 기록하면서 후사시게의 기록을 깨고 새로운 세계기록 보유자가 된다. 또한 우리나라의 손기정이 그해 11월 3일 2시간 26분 42초를 기록하고, 약 12년 후인 1947년 4월 19일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를 찍으면서 아시아 선수 4명이 연달아 세계기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물론 우리의 마라톤사가 기록하는 바는 이와 다르다. 1931년 10월 10에 이미 김은배가 2시간 26분 12초(제7회 조선신궁대회)를 기록했고, 1935년 4월 27일(제1회 조선선수권대회)에 손기정이 2시간 25분 14초를 작성하며 김은배의 기록을 깼다. 우리의 기록대로라면 아시아인 최초의 세계기록 작성자는 김은배이며, 그 뒤를 손기정이 잇게 된다. 일본의 후사시게나 이케나카는 물론 한국의 서윤복도 세계기록 작성자가 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에서 열린 대회의 기록이 세계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생긴 마라톤사의 오류인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스즈키 후사시게와 야스오 이케나카는 연달아 세계마라톤을 평정하며 동양인의 힘을 보여준 러너들이다. 당시 역사가 주는 아픔이 있다 해도, 이들이 세계마라톤사에 큰 획을 그은 ‘전설의 러너’들임은 부정할 수 없다.

‘석연찮은’ 세계기록 작성자 후사시게 

스즈키 후사시게(鈴木 房重)는 1914년 2월 15일에 태어나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마라토너다. 일본의 가장 전통 있는 역전경주인 하코네역전에서 자신이 소속된 대학의 4연패를 이끌었다. 특히 언덕코스에 강해 ‘오르막의 명인’으로 불렸다.

마라토너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35년 21세 젊은 나이로 일본 전국마라톤연맹 주최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다. 3월 21일 열린 이 대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손기정이 2시간 26분 14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후사시게가 2시간 27분 49초로 뒤를 이었다.

그런데 후사시게의 이 기록은 이후 3월 31일 열린 ‘어떤’ 대회의 우승기록으로 둔갑하여 마라톤 세계기록 변천사 자료에 실리게 된다. 이는 일본의 스포츠 평론가들 사이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순위도 대회일도 사실과 다르므로 ‘잘못 유포된 사실’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 경위에 대해선 △식민지 선수 손기정의 참가를 ‘비공식’으로 처리해 우승자가 되고 대회날짜는 잘못 알려진 것 △21일에 열린 대회는 공식 거리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록 인정이 안 됐으며, 후사시게의 기록만 잘못 전파된 것 등의 추측이 나오고 있다.

아무튼 손기정과 함께 우수한 기록을 작성하며 유망주로 떠오른 후사시게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대표 최종선발전에서 3위를 하며 10000m와 마라톤 국가대표가 됐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던 그는 막상 베를린 현지에 도착해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자리에 드러누울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표 자격을 다른 선수에게 넘겨주고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병원에서는 먼 이국땅에서 온 외국인이 고열을 호소하자 전염병을 우려해 격리수용했다. 나중에 몸이 회복되어 선수촌으로 돌아온 후사시게는 콧수염이 무성하고 낯빛은 창백하며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식사는 매일 죽만 줄 뿐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지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후 스즈키 후사시게는 더 이상 마라토너로서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마라톤 유니폼 대신 군복을 입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남부 바다에서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망 년도는 1940~1945년 사이로 확실치 않다.

시대에 희생된 비운의 러너 이케나카

스즈키 후사시게의 세계기록 작성은 일본인들도 ‘석연치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동갑내기 러너 야스오 이케나카(池中 康雄)의 경우는 다르다. 어쨌든 정상적인 기록으로 세계기록 작성자가 됐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육상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14년 3월 3일(추정) 일본 오이타현 나카츠시에서 태어난 그는 도요대학 육상경기부 소속으로 선수생활을 했으며,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당시 일본의 간판 마라톤 스타였다. 1935년 4월 3일 열린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표 선발전에 참가한 그는 2시간 26분 44초로 우승하며 아사이인 최초 마라톤 세계기록 작성자가 됐다. 그는 손기정과 함께 대표선수가 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됐지만 동생이 큰 병을 앓아서 대량의 헌혈을 해야 했고, 베를린올림픽을 3개월여 앞둔 1936년 5월 21일 올림픽 대표 최종선발전에서 기권하고 말았다.

이후 1940년 제12회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촉망받는 선수였다. 무난하게 마라톤 대표로 선발되어 4년 전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1945년)으로 인해 올림픽 개최가 무산되면서 그의 꿈도 산산히 부서졌다. 이어 영국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13회 올림픽마저 2차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취소되었다. 결국 이케나카는 당대 최고수준의 기량을 갖추고도 끝내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이케나카는 전일본육상경기연맹 올림픽 대표팀 코치 등을 역임했고, 장애인스포츠 발전에도 힘썼다. 또한 많은 신인 선수를 발굴하기 위해 마라톤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현재 일본 마라톤 대표팀의 등용문이 되고 있는 ‘벳푸-오이타 마라톤’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1992년 3월 14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의 꿈이었던 올림픽 무대에는 서지 못했지만 말년까지 후진 양성을 위해 힘쓴 그의 공로는 일본 육상계의 존경을 받고 있다.

[30~4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작성된 세계적인 기록들]
1931-10-10 김은배(2:26:12) 제7회 조선신궁대회
1935-03-21 손기정(2:26:14) 일본의 '전국마라톤연맹' 주최 대회
1935-03-31 후사시게(2:27:49) 동경메이지신궁대회(실제는 21일 대회)
1935-04-03 이케나카(2:26:44) 베를린올림픽 대표선발전
1935-04-27 손기정(2:25:14) 제1회 조선선수권대회
1935-11-03 손기정(2:26:42) 메이지신궁체육대회
1947-04-19 서윤복(2:25:39) 보스턴마라톤

※ 위 기록 모두를 공식 인정할 경우 김은배가 아시아선수 최초의 세계기록 작성자가 되며, 손기정이 그 뒤를 잇게 된다. (나머지는 세계기록 아님) 당시 우리나라가 주최한 대회의 기록은 세계적으로 공식 인정이 되지 않는데, 그렇다 해도 후사시게 대신 손기정의 기록이 등재돼야 맞다. 3월 31일 작성됐다고 알려진 후사시게의 기록은 사실 3월 21일 작성된 2위(1위 손기정) 기록이다.

[남자마라톤 세계기록 변천사] (현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록 이름 국적 날짜
2:55:19 존 헤이즈 미국  1908.7.24
2:52:46 로버트 플라월 미국  1909.1.1
2:46:53 제임스 클라크 미국  1909.2.12
2:46:05 알버트 레이즈 미국  1909.5.8
2:42:31 헨리 바레트 독일  1909.5.26
2:40:35 투레 요한슨 스웨덴  1909.8.31
2:38:17 해리 그린 독일  1913.5.12
2:36:07 알렉시스 알그렌 스웨덴  1913.5.31
2:32:36 요하네스 콜레마이넨 핀란드  1920.8.22
2:29:02 알버트 미첼슨 미국  1925.10.12
2:27:49 스즈키 후사시게 일본  1935.3.31
2:26:44 야스오 이케나카 일본  1935.4.3
2:26:42 손기정 한국  1935.4.3
2:25:39 서윤복 한국  1947.4.19
2:20:43 제임스 피터스 영국  1952.6.14
2:18:41 제임스 피터스 영국  1953.6.13
2:18:35 제임스 피터스 영국  1953.10.4
2:17:40 제임스 피터스 영국  1954.6.26
2:15:17 세르게이 포포프 구 소련  1958.8.24
2:15:17 아베베 비킬라 에티오피아  1960.9.10
2:17:38 토루 테라사와 일본  1963.2.17
2:14:28 레오나르드 에델렌 미국  1963.6.15
2:13:55 바실 히틀리 영국  1964.6.13
2:12:12 아베베 비킬라 에티오피아  1964.10.21
2:12:00 모리오 시게마츠 일본  1965.6.12
2:09:37 데렉 클레이톤 호주  1967.12.3
2:08:34 데렉 클레이톤 호주  1969.5.30
2:08:18 로버트 카스텔라 호주  1981.12.6
2:08:05 스티브 존스 영국  1984.10.21
2:07:12 카를로스 로페스 포르투갈  1985.4.20
2:06:50 벨라이네 딘사모 에티오피아  1988.4.17
2:06:05 호나우두 다 코스타 브라질  1998.9.20
2:05:42 할리드 하누치 미국  1999.10.24
2:05:48 할리드 하누치 미국  2002.4.14
2:04:55 폴 터갓 케냐  2003.9.27
2:04:26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 에티오피아  2007.9.30
2:03:59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 에티오피아  2008.9.28
2:03:38 패트릭 마카우 케냐 2011.9.25
2:03:23 윌슨 킵상 케냐 2013.9.29
2:02:57 데니스 키메토 케냐 2014.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