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가이드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케냐 마라토너 귀화 대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는 법적인 한국인이 될 전망이다. 태극마크를 다는 문제 역시 지금처럼 주요 언론이 작심하고 도와준다면 어렵사리 가능할 것 같다. 대한육련이 야심차게 둔 이 흑돌 하나가 과연 신의 한 수가 될 지, 악수가 될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귀화 추진 중인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는 누구?

곧 한국인이 될 지도 모르는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에 대해 살펴보자. 마라톤 지도자 출신인 백석대 스포츠과학부 오창석 감독이 발굴한 이 선수는 2011년 경주국제마라톤(2:06:46)과 2012년 서울국제마라톤(2:05:37)에서 우승하며 마라톤 커리어 전부를 한국 대회에서 쌓았다. 2시간 5분대 기록을 찍었는데도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는 대형 에이전트 대신 오창석 감독과 함께하는 쪽을 택했다.

2012년경부터 귀화 추진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가 금지약물 복용 파문에 휘말려 2년간의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본인 해명에 의하면 케냐 현지에서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잘못 맞은 것이라고 한다. 올해 명예회복을 위해 서울국제마라톤에 출전한 그는 2시간 06분 11초의 우수한 기록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귀화 추진이 본격화되면서 찬반 논쟁도 뜨거워지는 상황이다.

육련이 말하는 ‘에루페 효과’ 어디까지나 기대일 뿐

한창 노력 중인 육련 관계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에루페 귀화 추진은 섣부른 충동구매일 수 있다. 뚜렷한 목표의식이나 검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화를 추진하는 쪽의 논리들은 대략 이렇다. ①케냐 등 아프리카 선수 귀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②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메달 획득을 노릴 수 있다 ③침체된 한국마라톤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프리카 선수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고, 상대적 선진국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부족한 선수 자원을 채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종전시장 미국이나 오일머니로 인적자원을 사들이는 중동의 경우를 우리가 따라갈 이유는 없다. 우리 육상계에 필요한지, 우리 육상팬들이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에루페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메달 획득이 가능할까? 가능성을 크지 않다. 개인최고기록이 2시간 5분 37초로 우수하지만 세계무대엔 2시간 3~4분대 현역선수가 20여명은 된다. 세계육상선수권과 6대 메이저마라톤 입상도 쉽게 바라볼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에루페는 금지약물 복용에 의한 자격정지 2년의 징계를 받은 바 있어 대한체육회 규정상 2018년이 되어야 대표선수 선발 자격이 생긴다. 편법이 적용되지 않는 한 리우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

한국 마라톤은 에루페의 귀화를 통해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더 발전하게 될까? 이건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황영조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압도적인 실력차이에 한국 선수들이 위축되고 뛸 의욕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전망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른 현역 지도자들도 대체로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육련 행정가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지 않고 귀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듯하다.

단지 5분대 선수 하나를 득템했다는 생각이라면 위험

에루페의 귀화로 인한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국내 주요 대회 우승은 그의 차지가 되고 한국기록 경신도 즉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한국기록을 내고 나면 예외규정을 적용해 리우올림픽에 내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된다. 올림픽 메달 획득에 실패하더라도 해외 유명 대회나 아시안게임 우승을 통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마라톤의 역사가 바뀌고 환경도 바뀐다.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대변한 스포츠인 마라톤은 이름만 ‘오주한’으로 바뀐 케냐 용병이 간판스타가 되는 것이다. 제2, 제3의 에루페는 곧 생기기 마련이다. 실업팀이라면 국내외 주요 대회에서 우승할 선수를 보유하고 싶을테니까. 한국 토종 선수들은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으므로 사실상 2군으로 전락하게 되고, 이 폐단을 막겠다며 ‘귀화선수 시상 제외’와 같은 편법이 동원되면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질 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 가지 파장들이 예상 가능한데도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주도하는 ‘전략적 귀화’ 추진이 과연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우리 마라톤은 당장 아프리카 선수를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될 중대 위기에 빠졌는가?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남자마라톤 한국기록은 아프리카 귀화선수라도 데려와서 반드시 깨야 하는 걸까? 올림픽 마라톤 메달은 우리의 숙원인가? 점차 줄어가는 마라톤 선수 자원은 용병으로 채워서라도 일정량을 유지해야만 할까?

위 질문에 주저 없이 ‘예’라고 답할 이들은 아마도 소수의 스포츠 행정가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는 엘리트 마라톤이 국제대회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이나 선수 부족으로 인해 육련의 경기 수나 줄어드는 것이 큰 근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생활스포츠가 두터워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으며, 특단의 대책보다는 기다리는 자세가 현명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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