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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가이드 - 뉴스
1948 런던올림픽 마라톤, 아깝게 우승 놓친 최윤칠
편집자   등록일 : 2012-07-11 오후 12:54:32


역사상 3번째 런던올림픽이 7월 27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린다. 국가별로는 미국(4회)에 이어 2번째로 많이 개최하는 것이고 도시별로는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하게 된다. (파리, 로스앤젤레스, 아테네 등 2회) 런던 시민들이 이번 올림픽에 각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의 마라톤 팬(특히 중장년층)들에게도 상당히 기대되는 올림픽이 아닐 수 없다. 64년 전 같은 이름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아쉽게 놓쳤으니까. 당시 런던을 질주한 러너는 바로 최윤칠(84) 선수다.


초교 때부터 성인과 경쟁해 ‘한반도 최강’ 등극

마라토너 최윤칠(84)은 1950년 보스턴마라톤 3위, 1952년 헬싱키올림픽 4위로 기억되는 당대의 스타다. 별명은 마라톤 왕, 대한민국 에이스, 그리고 비운의 마라토너. 제 실력에 비해선 국제무대에서의 성취가 따라주지 못했던 러너라고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다.

1928년 7월 19일 함남 단천군 하다면 극동리에서 태어났다. 심심산골이지만 부농이어서 무려 10남매가 큰 어려움 없이 컸다. 장남인 최윤칠은 어려서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6km 떨어진 보통학교까지 달려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는데 그게 훈련이 되어 달리기 실력이 급성장했다. 11세 때 단천군 체육대회 6km 경주에서 성인들과 경쟁해 2위를 했고, 6학년 때는 단오절 경축 체육대회 5000m 우승, 중학교 2학년 때는 함경남도 육상선수권대회 10000m에서 우승했다. 이른바 타고난 마라톤 신동이었다.

어린 최윤칠이 도내에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 때 대동아전쟁(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하루아침에 설 곳을 잃었다. 그러나 최윤칠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 1946년 평양에서 열린 해방경축종합체육대회 100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47년 4월 월남한 이후 서윤복 보스톤제패기념 단축마라톤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명실 공히 남과 북을 통틀어 최강의 장거리 주자였다.

21세 런던올림픽 도전한 천재, 우승 문턱에서 좌절

남다른 소질을 김혁진 당시 경복중 코치가 눈여겨보고 경복중학교에 편입시켜 체계적으로 지도했다. 맹훈련 결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국제대회에 도전할 만큼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1947년 가을에 열린 런던올림픽 파견선수 1차 예선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후 남승룡(1935년 베를린올림픽 동메달)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1948년 6월 최종선발전에서는 당디 최고의 마라톤 스타 서윤복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올림픽 선수단은 일본을 경유하여 런던행 대장정에 올랐는데, 당시 신문은 일본 현지 소식통을 인용하여 마라톤에서 최윤칠의 우승이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기량으로 보나 상승세로 보나 돋보이는 선수였던 것이다.

1948년 8월 7일 마라톤 경기 날. 높은 기대치에 부응하듯 최윤칠은 정말 잘 달렸다. 8만 4000명의 관중이 보는 앞에서 출발하여 운동장을 빠져나가기 전부터 선수로 달렸다. 최윤칠이 시종일관 선두로 달리고 다른 한국 선수들이 멀리서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무리한 최윤칠은 선수 후반까지 선두 경합을 벌이다가 결승점을 4마일 남겨두고 기권했다. 나머지 한국 선수 홍종오가 25위, 서윤복이 27위에 그쳤다.

올림픽 마라톤, 국민적 기대가 국민적 비난으로

그냥 실패한 경기가 아니었다. 국가적 재앙이었다. 잔뜩 기대했던 국민들은 크게 낙심했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아무리 컨디션이 나쁘다 하더라도 2~3위 안에는 들 것으로 예상했다’ 며 ‘어떤 이는 라디오 중계를 듣다가 격분하여 라디오를 부숴버렸다’고 시민들의 반응을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항간에는 마라톤 참패의 배경에는 뭔가 밝힐 수 없는 곡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선 마라톤 참패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온다 할 정도였다. 체육관계기관이 경주의 실패 원인을 조사해 공표함이 마땅한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은 대중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구체적인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각 신문들도 마라톤 대표선수들을 처절하게 질타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경향신문은 특집기사에서 ‘각 개인의 실력만 믿고 전반전에 기력을 소모한 것’ ‘국내에서 (마라톤 대표선수간의)협동정신 배양과 합동연습이 짧았던 것’ ‘대표팀 감독이 많아(2명) 선수들이 누구의 지시를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 ‘식사관계로 인한 도중의 사고 발생’ ‘선수들이 코치 지시에 불복종’ ‘조국의 영예를 망각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작전도 없이 질주’ 등 9가지를 패인으로 꼽고 그러한 모든 이유로 인해 국내에서 작성한 자기 기록에도 미치지 못한 가장 불량한 짓을 저질렀다고 혹평했다. 또한 우리 선수들의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한)폭주가 국제적 위신마저 떨어뜨렸다고 덧붙였다.

이쯤 되면 올림픽 마라톤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기대와 실망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선수들이 느낀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아니었을까?

갖춘 기량만큼 높이 날지 못한 ‘비운의 마라토너’

최윤칠은 올림픽 이듬해인 194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고 보스턴마라톤 파견선수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다시 한 번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당시 대회는 연맹 임원들간 힘겨루기와 암투로 얼룩지면서 출국 도중에 파견 취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실제 도전은 1950년 대회였다. 최윤칠은 마찬가지로 선발전 1위(2:27:58)를 차지했다. 기대는 가장 많이 받았지만 결과는 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신예 함기용이 우승, 송길윤이 2위, 자신은 3위에 머물렀다. 이 때부터 ‘실력은 뛰어나지만 국내용’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야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국내 정세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1951년 관주전국체전 우승(2:25:19)을 발판으로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마라톤의 맹주는 ‘인간 기관차’로 불리던 에밀 자토펙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은 경기였다. 자토펙과 짐 피터스 등이 경합하는 레이스에서 그는 종반까지 4위를 마크하며 달렸다. 막판 순위싸움으로 메달권 진입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주로에서 응원하던 복싱선수 주상겸이 순위를 잘못 알고 “이대로 가면 3위로 골인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최윤칠은 무리한 추격전 대신 동메달 수성을 위해 페이스를 조절했고 결국 4위로 골인했다.

그의 국제전 수상은 1954녀 마닐라아시안게임 1500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이 마지막이다. 같은 해 일본 아사히마라톤 출전을 끝으로 은퇴했는데, 마라토너가 은퇴 직전에 트랙종목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키 175cm, 체중 70kg으로 마라토너로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조건을 가졌다. 근육질에 힘이 좋은 대신 마라톤 레이스 중 쥐가 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레이스 전에 늘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어쩌면 마라톤보다 트랙 장거리와 하프마라톤에 적합한 선수가 아니었을까? 혼돈의 시대에 태어난 육상 천재의 불운이다.

Copyrights ⓒ 클럽마라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drives*** 2012-07-12 답글답글
 

국제대회에서 원하는 성적을 못 내던 최윤칠 선수 본인 마음은 오죽했을까요...
거기에 국민들의 비난까지 더해서 많이 힘들었을 생각을 하면 현재 국내용이라 평가받는 각 종목의 선수들도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력을 안한 것도 아닌데 최선을 다하고도 혹평을 감내해야 하는 선수 여러분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도 행여 메달을 못 받았다고 선수들을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겠습니다.
마라톤을 비롯해서 그 동안 런던 올림픽을 열심히 준비한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편집자 2012-07-16 답글답글
 

은퇴 후에도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사실 칭찬받을 만한 성적인데, 당시 대중들은 스포츠를 단순히 오락으로 즐기기 어려운 시대를 산 것 같습니다.


dlakstj*** 2012-07-12 답글답글
 

본인은 죽고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스터 선수임에도 썹-3 도전에 실패하면 왜 안될까를 계속 뇌까리게 되는데...
주변의 여론도 선수 생활에 일부분 장애 요인인듯 싶습니다.
우리 국내선수들도 지금껏 열심히 연습한것 많큼 런던올림픽에서 좋은결과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2012-07-16 답글답글
 

대중들은 그렇다 치고 당시 언론들이 몰아붙인 모습은 너무 과했다고 봅니다.


dold*** 2012-07-13 답글답글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입니다.
운이 없기보다는 대회에서 나타나는 기록이 그 선수의 능력 아닐까요?


편집자 2012-07-16 답글답글
 

그도 맞는 말이군요. 또한 누군가 져야 하는 게 스포츠이기도 하죠.


bravet*** 2012-07-17 답글답글
 

모든 선수들이 같을 수는 없겠죠. 황영조는 그 반대 아닐까요?


편집자 2012-07-18 답글답글
 

그렇네요. 황영조의 올림픽 우승은 찬스에 강한 승부사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100i*** 2012-07-17 답글답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네요. 존경스럽습니다.


편집자 2012-07-18 답글답글
 

한국전쟁 전후에 활동하던 기초종목 선수들은 대부분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힘겹게 운동했다고 합니다.


warr*** 2012-07-18 답글답글
 

어떤 운동이던 멘탈이 가장 중요한데.....
결과늘 놓고 보면...최윤철선수의 멘탈이나 기량, 신체조건 등이 마라톤보다는 중장거리가....해외보다는 국내가 맞는 건 아닐런지....


편집자 2012-07-18 답글답글
 

다양한 유형의 선수를 포용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우리 육상계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 시절엔 오로지 마라톤에 올인해야 하는 분위기였고, 해외대회 성정에 대한 기대치도 너무 높았죠.


qkrwo*** 2012-07-27 답글답글
 

대한민국 마라톤의 역사의 일부분이군요.. 대한민국 전 국민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그날을 위해...대한민국 화이팅!


booke*** 2012-08-02 답글답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말도 있더군요.
기량도 중요하지만 운도 실력의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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